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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宗敎人 김병윤의 ‘하나님과의 대화(21) 윤회, 원죄설과 대속설

김병윤 | 기사입력 2022/04/05 [05:58]
원죄설이나 대속설이라는 개념은 여호와나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었다

無宗敎人 김병윤의 ‘하나님과의 대화(21) 윤회, 원죄설과 대속설

원죄설이나 대속설이라는 개념은 여호와나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었다

김병윤 | 입력 : 2022/04/05 [05:58]

윤회: 

 

윤회는 자신의 일정 부분(즉 육체나 의식 등의 정신)이 이어져 나간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는 상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일부 입증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방적인 주장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전생을 아는 경우는 없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모든 존재가 새로 태어날 때 완벽하게 다른 육체와 정신을 갖는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면 윤회는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플라톤은 죽음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로 정의한다.” 1)대화편의 일부인 파이돈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포식, 방탕과 폭음에 몰입하고 이를 피하려는 생각 없이 산 사람은 당나귀나 그런 류의 동물로 태어날 것이며, 부정, 독재와 폭력을 선택한 사람들은 이리, 매 또는 솔개로 태어날 것이다. 반면에 절제를 잘하고 정의롭게 산 일반인은, 집단 생활에 능한 벌이나 개미 또는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철학자나 배움을 사랑한 사람들은 죽을 때 완벽하게 순수한 상태가 되어 신들과 조우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2)

 

이집트인들은 영혼이 3,000년에 한 번씩 주기를 마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인간이 죽은 후 영혼이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한 주기 동안 동물, 곤충, 물고기, 새 등의 모습으로 살게 된다고 믿었다.” 3) 또한 출애굽기 3:14에 여호와가 자신이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 또는 I am who I am)’라고 하는데, 이 또한 이집트인이 자신들이 믿는 신을 스스로 있는 자(Nuk-pu-Nuk)’로 부르던 것을 표절한 것이다.” 4)

 

아인스호키: “이들은 한 주기를 정확히 2,842년으로 계산했다. 하지만 시체를 썩지 않게 보관하면 이 주기가 시작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 기간 동안 보존하면 하등동물의 상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믿었기에 사체를 방부처리하여 미라의 형태로 보존했다.” 5)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몸에 대해 언급하면서,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가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나니”(35-40)라는 이야기는 그리스의 영향을 받고 윤회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밑금 친 부분의 이야기는 사람의 육체, 짐승의 육체, 새의 육체와 물고기의 육체가 각각 다르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는 위에서 플라톤이 언급한 윤회하면서 나올 대상인 인간, 짐승 그리고 조류에 더해 물고기까지 범주를 넓혀 정의합니다.

 

만약 한 시대의 사람이 전생의 정체성을 찾아 다른 시대의 사람과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비록 그가 전생에 부처님이나 예수님이었더라도 정체성의 혼돈으로 겪게 될 고통이 너무 심해서 결국 미쳐버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 전생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의식이 잔류된 상태를 다음 생으로 이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전생에서 자신의 행위에 따라 여러 형태로 갈라져 나온 것들은 다음 생에서 다른 존재로 나오게 될 개연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때는 이미 육체가 없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의식이나 사고를 담을 대상이 없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신이나 의식이라는 것은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함께 사라지게 됩니다. 일종의 에너지나 진동의 상태로 분리되어 나간 것만이 자신과 맞는 진동에 감응하여 다음 생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원죄설과 대속설:

 

원죄설이나 대속설이라는 개념은 여호와나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원죄설은 여호와의 율법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전혀 나오지 않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기원후 5세기경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원죄설을 주창하였고, 이후 기독교계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신화의 주인공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실수 때문에 모든 인류가 원죄의 대상이 된다는 가설은 비합리적이며 설득력이 없습니다.

 

인간들이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는 주장은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감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6),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23)라는 문구에서 비롯된다. 6)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16-17)라는 이야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본성으로서의 원죄의 실마리를 찾는다. 그는 아담과 이브의 반란 이야기를 인간이 본질적으로 지닌 죄를 저지르려는 성향에 대한 메타포로 보았다. ‘원죄라는 개념을 기독교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4대 복음서를 채택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이레네우스다. 그는 이단논박이라는 책에서 아담의 후손들은 죄와 죽음의 포로로 태어난다고 말한다. 아담은 사탄으로부터 죄를 세상에 들여오는 통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레네우스의 죄의 기원에 대한 교리를 발전시켜 그 전달 과정을 부연 설명한다. 그는 죄가 성교에 내재한 정욕을 통해 다음 세대로 전염된다고 생각했다.”7)

 

오직 유대인의 우화 속 주인공 부부며 자신들의 초대 선조인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행위 때문에 모든 인류가 원죄의 불명예를 안고 태어난다는 것인데, 이를 믿고 따르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신이나 예수도 아닌 일개 신학자가 만들어 낸 원죄설이나 대속설이 기독교계의 교리로 자리 잡고, 이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이단으로 몰아 내쫓거나 잔인한 고문을 하고 심지어 화형까지 시켰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으로 인류가 원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대속설 또한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습니다. 대속설은 바울의 주장으로부터 시작하여 8)기독교계에서 교리로 정립한 것이지 예수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대속설은 누가복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바울 서신에만 등장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복음서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림으로서 모든 인류가 지은 죄를 씻어 구원하였다는 대속설을 주장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희생을 통한 속죄로 인류의 죄가 사면되었다면 더 이상 과거의 죄를 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는 원죄설의 완전한 폐지를 통해 완성될 수 있습니다.

  

죄 때문에 죽어 마땅한 인간을 대신해서 하나님이 그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켰다고 말하는 속죄(贖罪) 신학은 일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예수를 사랑하게 만들지는 모르나, 그것은 하나님의 부도덕한 모습이다. 그것은 거의 하늘에서 일어난 아동 학대(child abuse)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상상력에도 나쁜 영향을 줄지 모른다.” 9)

 

우리 인간은 죄 가운데 살지 않는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나지도 않는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우리의 원죄의 때를 씻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만약 세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하는 타락한 피조물들이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과거의 진화 과정을 통해 등장했으며, 우리는 여전히 그 과정 중에 있다. 우리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점은 우리가 그 길고도 힘든 과거의 생존자들로서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짐에 대한 표지(sign)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타락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킬 구원자란 다윈 이전 시대의 미신이며, 다윈 이후 시대에는 헛소리(nonsense).” 10)

 

종교 지도자들은 인간 생명이 부패했고 하나님의 은총에서 떠났다는 도전받지 않는 가설 아래, 인간들은 형벌이 필요하고 또한 구원, 구출, 속죄 등을 위해 하나님께 계속 간구해야 하는 체제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그의 자녀임을 깨닫도록 세뇌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죄의식을 강조하는 것은 제도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사람들이 일단 자신들이 타락한 죄인들이라는 진단을 받아들이면, 교회는 교회 자체가 통제하는 은총의 통로를 통해서만 용서가 가능하다는 설득을 개시한다. 미사에서 예수의 대속적 죽음의 재현은 예수가 그들의 죄 때문에 대가를 지불하였다는 것을 매주 죄인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가톨릭[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저자 주]이 조직적 죄의식을 이용한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11)

 

전지전능하여 사람의 머리털까지 셀 수 있고(마태복음 10:30, 누가복음 12:7), 마음의 비밀까지 아는(시편 44:21) 존재는 신성한 계획을 갖고 있을 것이며, 모든 존재가 어떤 식으로 행동할 것인지를 충분히 가늠하고 예상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각자의 행동이 신이 미리 세워둔 계획에 의거하여 실행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렇다면 아무리 나쁜 행동을 한 악인이라고 하더라도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아담과 이브로 인한 원죄설에 이어 예수님의 죽음으로 대속의 혜택까지 받은 인류에게, 이제는 자유 의지가 주어졌기 때문에 이에 따라 행동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신의 전지전능함은 반감되거나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존재를 앞세우는 종교로부터 국가 법체계를 유지해 나가는 기득권층을 보조하는 역할 이상의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출처:

1) Euthyphro, Apology, Crito, Phaedo, Plato, Prometheus Books, Amherst, NY, 1988: 76

2) Euthyphro, Apology, Crito, Phaedo, Plato, Prometheus Books, Amherst, NY, 1988: 98-99

3) Herodotus 2; 123

4) Life and Teachings of Zoroaster, the Great Persian, Loren H. Whitney, BiblioBazzar, 2009: 180-181

5) Life and Teachings of Zoroaster, the Great Persian, Loren H. Whitney, BiblioBazzar, 2009: 222-223

6) 일상적 폭력 폭력적 종교, 이종록, 쿰란출판사, 2017: 449

7) 신의 위대한 질문, 배철현, 21세기북스, 2015: 24-25

8) 누가복음 1:68, 2:38, 21:2824:21, 로마서 3:248:23, 고린도전서1:30, 에베소서1:7, 1:14, 4:305:16, 골로새서1:144:5, 디도서 2:14, 히브리서9:129:15, 베드로전서 1:18, 요한계시록 5:9, 14:3, 14:4

9) 예수는 누구인가, 존 도미닉 크로산 지음 한인철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1998: 190

10)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존 쉘비 스퐁,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138

11) 성경의 시대착오적인 폭력들. 존 쉘비 스퐁, 한국기독교연구소, 2007: 222-223 

 

필자 김병윤1957년생으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와 퍼듀대학교 MBA 과정을 졸업했다. 대우조선과 삼성전자에서 20년 이상 근무하며 마케팅업무를 담당했으며, 삼성인력개발원에서 국제화 및 외국어 교육팀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가천대학교, 신구대학교, 연세대학교 원주분교 및 호원대학교에서 겸임교수와 시간강사로 활동했다. 현재는 두레스경영연구소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삼성신화 아직 멀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 대한민국 판도라 상자를 열다, 정아에게 보내는 서른 장의 편지, ()과 영()등이 있다. 

 

*21윤회, 원죄설과 대속설편은 20회 연재된 영혼과 부활편 다음에 들어갈 내용으로서 뒤늦게 게재함을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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